과하주, 여름에 상하기 쉬운 약주에 독한 소주를 타서 발효를 중단시킨 술 서양의 포트와인보다도 많게는 100년 앞선 술, 음용방법도 훨씬 다양 과하주시음회 등 소비자 대상 교육기회 만들어 나갈 터 “현재 과하주는 약주, 기타주류로 분류돼, 주세법상 주종 ‘과하주’로 복권시켜야”
우리 술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곡식과 누룩, 물을 섞어 발효시키는 발효주, 그리고 이를 증류한 소주가 그것이다. 막걸리와 약주로 대변되는 발효주는 부드럽고 맛이 좋은 반면, 알코올 도수가 낮아 기온이 높은 여름철엔 변질될 우려가 높다. 반대로, 소주는 높은 도수 덕분에 변질은 거의 일어나지 않지만, 술이 독한 것이 단점이다.
조선 초기에 처음 빚어졌을 것으로 추정되는 과하주는 발효주의 단점(쉬 상한다)과 소주의 단점(맛이 독하다)을 보완한 선조들의 슬기가 돋보이는 우리 술이다. 소주가 고려 말 몽골을 통해 전해진 것과 달리, 과하주는 자생적으로 우리 조상들이 터득한 술빚기로, 아시아는 물론 서양보다 앞선 양조기술로 알려져 있다.
1950~1960년대까지만 해도 주세법상 주종의 하나로 대우받던 과하주는 그러나, 현재는 약주 혹은 기타주류로 분류될 정도로 존재감이 희미해졌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한국가양주연구소 류인수 소장을 비롯한 전통주 관계자 10여명이 15일 한국과하주진흥위원회를 발족시키고, 앞으로 과하주를 체계적으로 연구하고 과하주를 널리 알리는 교육세미나를 정기적으로 개최하는 등 과하주 진흥을 통해 한국전통주 산업발전에 기여하기로 했다. 과하주진흥위원장에는 10여종의 과하주를 생산하는, 과하주 전문 양조장인 술아원의 강진희 대표가 맡기로 했다.
이날 과하주진흥위원회 참석자로는 한국가양주연구소 류인수 소장, 한국술문헌연구소 김재형 소장, 농촌진흥청 강희윤 박사, 최정욱의와인연구소 최정욱 소장, 과하주 전문 양조장 술아원 강진희 대표, 세종사이버대학 명욱 교수, 대동여주도 이지민 대표, 디히랑(한식주점) 신재은 대표, 남산술클럽 더스틴 웨사(Dustin Wessa) 대표 등이 참석했다.
회의 초반에는 한국술문헌연구소 김재형 소장이 ‘과하주의 역사적 가치’를 주제로 짧은 강의가 열렸다. 다음은 강의 요약.
“과하주라는 명칭은 태종실록에서부터 나온다. 조선 3대 임금 태종 이방원은 1418년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여름을 지낼 술(과하지주)을 이 도읍(개성)에서는 많이 빚을 수 있기 때문인가?’, ‘한경(서울)에서도 또한 과하주를 빚을 수 있으리라’고 했다고 태종실록은 전한다. 다만, 태종이 언급한 과하주가 지금의 과하주, 즉 ‘약주 발효 과정에 소주를 넣어 발효를 멈춘 술’인 것인가는 명확하지 않다.
최초의 과하주 조리서는 1544년 ‘계미서’라는 문헌인데, 여기에 소개된 주방문(레시피)에는 소주를 첨가한다는 내용이 없다. 약주에 소주를 첨가해서 과하주를 만든다는 레시피가 처음 기록된 책은 1600년대 초반에 나온 ‘주찬방’이라는 문헌이고, 1670년에 나온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 요리책인 ‘음식디미방’에도 과하주 레시피가 자세히 기록된 걸로 보아, 이미 당시에는 과하주 술빚기가 가양주로 많이 보편화된 것으로 추정한다.
그리고 1909년 순종 3년에 단행된 주세법을 보면, 과하주가 청주, 약주, 백주, 탁주와 더불어 ‘제1류 주종’으로 분류돼 있음을 알 수 있다. 과하주는 이처럼 나라가 정한 주종에 들어갈 정도로 일반화된 술인데다, 외국 어디에서 들어온 술이 아닌 자생적인 우리기술로 빚은 술인 만큼, 과하주는 막걸리와 더불어 우리나라를 대표할 주종이라고 생각한다.”
이날 참석자들은 600년이 넘은 과하주의 역사성과 관련, 비슷한 술인 포트와인에 대해서도 열띤 토론을 벌였다. 세종사이버대학 명욱 교수는 “와인에다 브랜디를 첨가한 주정강화와인인 포트와인이 등장한 것은 백년전쟁 후로서, 포르투갈에서 영국으로 와인을 수송하면서, 술이 상하지 않도록 독주인 브랜디를 일부 넣은 것이 포트와인의 시작”이라고 말했다.
최정욱의 와인연구소 최정욱 소장은 “과하주가 정확하게 언제부터 빚어지기 시작한 것인지 아직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은 것처럼, 포트와인 레시피가 언제부터 등장하는지는 명확하지 않다”며 “다만, 과하주라는 명칭이 1400년대부터 나오기 시작했고, 백년전쟁(1337~1453년) 직후에 포트와인이 나온 것으로 보아, 과하주가 포트와인보다는 훨씬 앞서 등장했다고 추정된다”고 말했다. 한국가양주연구소 류인수 소장도 “발효주와 증류주를 혼합한 술 중에 전세계적으로도 가장 오래된 술이 우리 조상들이 만든 과하주”라고 말했다.
과하주는 약주 발효 도중에 알코올 도수 높은 소주를 넣어 발효를 중단시킨 술인 만큼, 알코올로 바뀌지 않은 당분이 많아, 일반 약주보다는 단맛이 강하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알코올 도수도 약주(알코올 도수 14도 안팎)보다 높다(과하주의 평균 알코올 도수는 18도). 고문헌 음식디미방에서도 과하주를 ‘달고 매운 술’로 소개하고 있다. 디히방 신재은 대표는 “달고 매운 과하주는 그래서 닭발, 제육볶음 같은 자극적인 맛이 강한 우리 음식과도 대부분 잘 어울린다”고 말했다.
이날 참석자들은 과하주가 우리 선조들의 지혜(여름에 술이 상하지 않도록 약주에 소주를 탄 것)가 돋보이는 술임에도 불구하고, 과하주가 지금은 널리 알려지지 않은 것에 대해 안타까움을 한목소리로 표시했다. 가양주연구소 류인수 소장은 “일제 치하에서 단행된 주세령에도 건재했던 과하주는 현재 주세법이 정한 주종 분류에서 아예 제외됐다”며 “당장은 어렵겠지만, 과하주를 다시 주세법이 인정하는 주종으로 복권시키는 게 옳다”고 말했다. 현재 과하주는 술아원의 경성과하주, 화양의 풍정사계 하, 지시울양조장의 화전일취 백화 18, 김천과하주 등이 시중에 나와 있으나, 약주, 증류식소주에 비해 종류가 많지 않다.
과하주 가격이 3만원대 이상으로 높고, 단맛이 강한 술이라는 점에서 앞으로 개선할 여지가 작지 않다는 지적도 나왔다. 전통주 플랫폼 업체인 대동여주도 이지민 대표는 “쌀로 만든 약주에 고급 증류식 소주를 일부 넣기 때문에 과하주는 가격이 비싼 편인데, 소비자들이 느끼는 가격저항도 꽤 있는 게 사실”이라며 “앞으로 단맛을 줄인 드라이한 과하주도 나왔으면 한다”고 말했다. 농촌진흥청 강희윤 박사는 “과하주는 요즘 대세인 하이볼로도 만들 수 있고, 비슷한 성격의 술인 포트와인보다는 훨씬 다양하게 즐길 수 있는 술”이라고 말했다.
이날 열린 한국과하주진흥위원회에서는 과하주 전문 양조장인 술아원의 강진희 대표가 위원장으로 추대됐다. 강진희 대표는 “현재 10여종의 과하주를 출시하고 있지만, 소비자들에게 과하주를 더 널리 알리도록 노력하겠다”며 “과하주 시음회를 비롯해 소비자들을 대상으로 한 교육세미나 등을 적극적으로 열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