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주 뉴스

[중앙선데이] '향기로운 첫 키스'에 취하다, 누룩 명인의 첫 술

조회 수 877 추천 수 0 2023.01.16 21:30:20

중앙선데이 입력 2023.01.14 00:21


이택희의 맛따라기


33d36e3a-0f32-4d1f-8d87-c54f6db2483d (1).jpg


전통누룩 명인 한영석 소장이 빚은 약주 시리즈 5종. 왼쪽부터 청명주, 하향주, 호산춘, 동정춘, 백수환동주. 주변의 누룩은 녹두로 띄운 1㎏에 33만원짜리 백수환동곡이다. [사진 이택희


“날카로운 첫 ‘키쓰’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 놓고 뒷걸음처서 사라졌습니다.”

지난해 4월 10일 시음회에서 처음 맛본 술을 생각하면 만해 한용운(1879~1944)의 시 ‘님의 침묵’ 가운데 이 구절이 늘 떠올랐다. ‘날카로운 첫 키스’가 아니라 ‘향기로운 첫 키스’였다.

맑고 경쾌하고 깔끔한 신맛과 은근한 단맛이 서로 스며 어우러진 술맛은 우아했다. 누룩 술인데 누룩 냄새가 아니라 화사한 향이 나는 건 더 놀라웠다. 사과 말릴 때 나는 듯한 과일 향 또는 꿀벌이 몰려오는 꽃밭에서 맡은 듯한 꽃 향이 권커니 잣거니 피어났다. 알코올 13.8%로 와인과 비슷하지만, 마시면 술보다는 덜 달고 향은 좋은 과일 주스 느낌이 앞선다. 우리 누룩 술이 이런 맛과 향을 내다니. 전통주에 관해 어설픈 ‘나의 지침’을 단박에 돌려놨다.

지난해 3월 24일 처음 출시한 ‘한영석 청명주’다. 술을 빚은 ‘한영석의 발효연구소’ 한영석(53) 소장은 “가장 전통적인 방법에서 배우고 현대적 기법으로 해석하여 시대가 요구하는 방향으로 최선을 다하여 전통주를 빚겠다”고 다짐하며 시음회를 마쳤다.

한 달에 약 5000병 만드는 대로 다 팔려

1.jpg

햇빛 아래 법제 중인 백수환동곡을 보여주는 한 소장과 ‘한영석의 발효연구소’ 로고. [사진 이택희]

설날을 앞두고 한 해를 마무리하며 지난해 맛본 술 가운데 다시 생각나는 것들을 헤아려봤다. 그 술이 떠올랐다. “2022년 프리미엄 전통주 최고 히트작”이라는 전통주 분야 유력인사의 찬사도 마음을 움직였다. 술을 어떻게 빚는지 알아보려고 지난달 30일 정읍 내장산국립공원 안 논실마을에 있는 양조장 겸 발효연구소를 찾아갔다.

맛과 향이 다채로운 만큼 술에 깃든 사연도 첩첩했다. 한 소장은 고창 우리술학교 이상훈 교장의 청명주 수업 때 청명주를 처음 맛봤다. 술을 배우면 배운 대로 꼭 빚어보았다. 청명주는 신맛이 났다. 평소 술을 못 마시고 신맛을 좋아하지 않는 그는 실패라 생각하고 다시 빚었다. 세 번 모두 같았다. 뒤로 끌고 가는 여운이 긴 매운 신맛이었다. 이 교장에게 물으니 그 맛이 맞다고 했다. 맛본 사람들은 매력적인 맛이라고 호평했다. 와인 마시던 사람들이 특히 좋아했다. 그때마다 진짜 맛있냐고 물으며, 왜 그럴까 7년을 고민했다.

그 맛의 원리는 평생 청명주를 가장 좋아했다는 이익(1681~1763)의 『성호사설』에 기록돼 있었다. “찹쌀 두 말을 여러 번 깨끗이 씻어서 사흘 동안 물에 담가 둔다(米二斗百洗浸水三日).” 이처럼 오래 불려 건진 쌀로 술을 담그면 쌀의 수용성 성분이 씻겨 나가면서 신맛이 난다.

이런 산미가 있는 술은 처음이었다. 술을 못 마시던 한 소장이 이 술은 자꾸 마시게 됐다. 묘한 매력이 있었다. 주량이 100mL인데 저녁마다 그만큼을 마셨다. 부인은 알코올 중독 아니냐며 걱정했다. 맛을 볼 때마다 제품으로 만들겠다고, 자신의 이름을 붙여서 세상에 내놓겠다고 다짐했다.

3.jpg

청명주 빚을 찹쌀을 씻고 있다. [사진 이택희]

‘7년의 숙제’가 풀리고 출시를 준비하면서 고민을 많이 했다. 중원당청명주(충북 무형문화재 제2호)가 이미 나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청명주 이름을 쓰지 않고는 『성호사설』에 실린 ‘사흘 담금(浸水三日)’ 양조법에서 유래하는 특유의 신맛을 설명할 길이 없었다. 논란을 무릅쓰고 ‘한영석 청명주’라는 상표를 붙였다.

술은 나오자마자 품귀였다. 열 달이 지났지만, 아직도 물량이 충분하지는 않다. 한 소장은 “한 달에 1000병 팔리면 잘되는 거라고 생각하고 처음 3200병을 생산했는데 3주 만에 다 나갔다”며 “요즘은 한 달에 5000병 가까이 생산하지만, 만드는 대로 다 나간다”고 했다. 지난해 매출은 5억원.

‘한영석 청명주’의 독특한 맛과 향은, 색다른 양조방법과 누룩에서 나온다. 우선은 산장법(酸漿法)이다. 고두밥 찹쌀을 깨끗이 씻어 오래 불리는 것이다. 산장은 우리말로 꽈리다. 담근 물에서 꽈리 또는 물고기 눈(魚眼) 같은 기포가 올라올 때까지 둔다. 여름엔 사흘, 겨울에는 열흘쯤 걸린다.

싱가포르·홍콩 수출, 미·유럽 진출 준비

4.jpg

쌀을 오래 불리는 산장(酸漿)이 진행돼 꽈리 같은 기포가 올라 오고 있다. [사진 이택희]

다음엔 저온에서 오래 발효한다. 발효실 온도는 일반 권장온도 25도보다 아주 낮은 13도였다. 거기서 700L 스테인리스 발효조에 500L씩 담아 60일 발효하고 거른 원주를 30일 숙성한다. 병에 담아 출고까지 다시 열흘이 걸린다. 누룩 준비 50일(발효 45일+법제 5일)을 더하면 5개월이 걸리는 셈이다.

결정적인 건 직접 띄운 누룩이다. 5배치(batch)를 바꿔가며 술을 담근다. 여기서 배치는 동시에 띄운 누룩 전체를 말한다. 현재 녹두곡, 향미주곡, 쌀누룩 3종으로 담근 청명주가 나왔다. 누룩에 따라 술맛과 향은 많이 달라진다. 두 배치를 현장에서 맛봤다. 과일과 꽃 향 그윽한 발효실에서 지난해 10월 21일 담가 발효가 끝난 녹두곡청명주를 맛봤다. 단맛이 혀를 감싸고 신맛은 그 위로 안개처럼 아련하게 피어올랐다. 잠시 후 숙성까지 끝난 쌀누룩 청명주를 맛봤다. 송이 큰 꽃이 개화하듯 화사한 신맛이 활짝 피어나면서 단맛은 그 그늘 아래로 몸을 낮췄다.

5.jpg

담근 지 70일이 지나 다 익은 청명주. [사진 이택희]

한 소장은 전통주 분야에서 기인에 가까운 사람이다. 2011년 척수염에 걸려 휠체어 신세를 질 만큼 심각한 건강의 위기를 극복하면서 식초에 빠졌다. 전래의 방식으로 식초를 맛있게 만들려고 하다 보니 좋은 술이 필요해 공부를 시작했다. 술맛은 결국 누룩이 좌우한다는 벽에 부닥쳐 누룩을 파고들었다. 자연상태에서 전통 누룩을 띄우려면 90일이 걸리는데 한 소장은 발효실 온도·습도·바람·산소량을 제어해 45일로 단축했다.

누룩이 잘 됐는지 판단할 방법은 술을 빚어보는 수밖에 없었다. 술맛이 기대만큼 안 나오면 무엇이 잘못됐는지 찾아서 그걸 수정했다. 반복하면서 데이터를 축적했다. 그 자료를 바탕으로 전통 누룩의 현대적 기준을 새로 작성해왔다. 시작한 지 10년이 채 안 돼 그는 우리나라 첫 ‘전통 누룩 명인’이 됐다. 2020년 7월 사단법인 한국무형문화예술교류협회에서 선정했다. 2017년 11월에는 누룩 디디는 방법과 기계에 관한 특허(제10-1805456호)도 취득했다.

누룩에 따라 술맛이 놀랍게 달라지는 걸 확인한 그는 제품으로서 술은 맛이 늘 일정해야 하는가 의문이 들었다. 내추럴 와인의 갖가지 맛에는 관대하면서 우리 술에 대해서는 왜 그리 엄격하고 냉정한지 저항감도 생겼다. 그래서 배치마다 맛과 향이 다른 ‘내추럴 약주’를 구상했다. 그는 “그 다름의 재미를 즐겨 달라”면서 “그게 표준화한 공산품이 아니라 자연발효가 만들어내는 묘미 아니냐”고 물었다. 누룩 술의 이런 특장점을 무기로 출시 다음 달부터 싱가포르와 홍콩에 수출하기 시작한 청명주는 유럽과 미국시장 진출도 서두르고 있다. 증류 실험도 10년을 거듭하고 있다.

한 소장은 자신의 누룩을 바탕으로 청명주·하향주·동정춘·호산춘·백수환동주로 이어지는 약주 5종 시리즈를 완성했다. 하지만 한 달에 5000병 생산을 목표로 준비한 시설은 청명주를 공급하기에도 벅차다. 시설을 늘릴 때까지 다른 술은 소량만 생산하고 있다.

술 잘 빚는 비법을 묻자 그는 “자꾸 담가보면서 실패에서 배워 자기 길을 여는 수밖에 없다”며 “모든 양조 과정에 자기 스타일을 확립해야 한다”고 말했다. 단기간에 명인 반열에 오른 지난 12년 자신의 용맹정진과 악전고투를 에둘러 말하는 듯했다.

출처 : ‘향기로운 첫 키스’에 취하다, 누룩 명인의 첫 술 | 중앙일보 (joongang.co.kr)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sort 조회 수

[SOMMELIER TIMES] [이대형의 전통주 브리핑] 술 멀리하는 MZ세대, 그리고 전통주 file

이대형 칼럼니스트 입력 2024.03.19 12:25 외식 시장에서의 주류 소비 감소 흐름이 크다 @픽사베이 최근 외식업 분들과 이야기를 하면서 가장 많이 들은 이야기가 소비시장 위축으로 주류 소비가 줄었다는 이야기다. 외식업 경기가 좋지 않...

  • 누룩
  • 2024-03-19
  • 조회 수 214

[서울경제] 향 넣으면 왜 막걸리가 될 수 없나요 file

입력 2024-03-12 17:44:42 수정 2024.03.12 17:44:42 황동건 기자 ■2030 취한 '향 막걸리' 규제에 발목 과일향 등 인공 첨가물 사용하면 주세법상 탁주 아닌 기타주류로 세금 30%씩 부과…마케팅도 제약 업계 "法항목 추가해 규제 완화를" ...

  • 누룩
  • 2024-03-12
  • 조회 수 294

[시사위크] '증류식 소주' 경쟁 재점화될까... 시장 전망은? file

연미선 기자 입력 2024.03.06 17:38 올해 들어 주류업체들이 새로운 증류식 소주를 선보이는 모양새다. 이에 증류식 소주에 대한 소비자 관심에 다시 불이 붙을지 이목이 쏠리고 있다. / 게티이미지뱅크 시사위크=연미선 기자 코로나 팬데믹 기간...

  • 누룩
  • 2024-03-07
  • 조회 수 248

[국제신문] [영상] 한국인이 즐겨찾는 고량주, 정작 중국에서 잘 안먹는다? file

김진철 기자 dia1445@kookje.co.kr 입력 : 2024-02-19 17:58:13 한국과 중국에서 술은 오랜 세월 삶의 중요한 부분으로 여겨져 왔다. 사회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생활 곳곳에 술이 ‘적셔’ 있다시피 하다. 두 나라 사람이 각기 술에 부여한 상징성 또...

  • 누룩
  • 2024-02-20
  • 조회 수 202

[KBS] 전통주 시장 양극화…소규모 업체 고전 file

입력 2024.02.12 (21:39)수정 2024.02.12 (22:19) 앵커 그동안 발효주 위주였던 우리 전통술이 증류를 거쳐 오크통에서 숙성하는 새로운 도전에 나섰습니다, 짧게는 몇 달, 길게는 몇 년까지 긴 기다임이 필요하다는데요. 기대와 우려...

  • 누룩
  • 2024-02-13
  • 조회 수 262

[ㅍㅍㅅㅅ] 위스키의 역사: 그런데, Whiskey랑 Whisky의 차이는 뭘까? file

2024년 1월 25일 by 사소한 것들의 역사 "위스키 보리, 밀, 수수 따위의 맥아에 효모를 넣어 발효시킨 후 이를 증류하여 만든 술. 알코올 함유량은 41~61%이며 영국산 스카치위스키가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시작하며최근...

  • 누룩
  • 2024-02-02
  • 조회 수 188

[연합뉴스] 막걸리는 최대 160일…36개 식품 소비기한 참고값 추가 공개 file

송고시간 2023-12-27 10:53 조현영 기자 소비기한 참고값 검색 서비스 [식약처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연합뉴스) 조현영 기자 = 식품의약품안전처가 막걸리, 커피 등 36개 식품 유형, 148개 품목에 대한 소비기한 참고값을 ...

  • 누룩
  • 2024-01-19
  • 조회 수 391

[한국농어민신문] “전통주 종합지원기관 신설…지속 성장·발전 뒷받침해야” file

안형준 기자 승인 2024.01.09 16:23 신문 3552호(2024.01.12) 8면 입법조사처 '전통주 보고서' [한국농어민신문 안형준 기자] 국내 전통주 산업의 지속적인 성장과 발전을 위해선 전통주 관련 제도와 정책을 지원하는 종합지원기관...

  • 누룩
  • 2024-01-15
  • 조회 수 306

[스포츠경향] 한국 전통주를 알린다 ‘막걸리 유네스코 등재 추진단’ 출범 file

손재철 기자 입력 : 2023.12.15 11:00 세계에 한국의 전통주 막걸리를 알리기 위해 ‘막걸리 유네스코 등재 추진단’이 공식 출범했다. 이번 출범한 추진단은 막걸리 빚기의 역사, 양조법 등 문화적 의미를 국제 공존 가치로 확산하고 막걸...

  • 누룩
  • 2024-01-09
  • 조회 수 236

[뉴스1] K-주류에 세계가 취한다…해외로 뻗는 '맥주·소주·전통주'

해외로 뻗는 '맥주·소주·전통주'어메이징, 수제맥주 美수출…원소주, 미국·유럽 등 영토 확장 롯데칠성, 미국 공략 강화…순하리·새로·처음처럼 수출 확대 (서울=뉴스1) 이상학 기자 | 2023-12-06 06:20 송고 | 2023-12-06 08:35 최종수정 (어메이징브루잉컴퍼니...

  • 누룩
  • 2023-12-15
  • 조회 수 444

[매일 경제] 대 이은 집안의 맛이 보물됐네…전통주 지켜낸 명인들 [푸디인]

안병준 기자 anbuju@mk.co.kr 입력 : 2023-12-08 09:00:00 수정 : 2023-12-10 11:53:27 [푸디人-5] 전통주 명인들(feat. 주봉석 전통민속주협회 사무국장) https://tv.naver.com/v/43903903 일제침탈과 전쟁, 금주령에도 술 만들더니…전통주 지켜낸 명인들 [푸...

  • 누룩
  • 2023-12-11
  • 조회 수 261

[농민신문] [우리 술 답사기] 술 빚어 마을 살리기…못해낼 줄 알았다면 ‘오산’입니다

입력 : 2023-12-04 18:22 수정 : 2023-12-06 05:00 경기 오산 ‘오산양조’ 지역쌀 비중 큰 ‘순곡주’ 위주 상품 출시 체험·문화행사로 골목상권 활성화 기여 대중적 막걸리·애주가 겨냥 증류주 다양 경기 오산의 오산양조장에서 만든 막걸리 ‘하얀까마귀(왼쪽부...

  • 누룩
  • 2023-12-06
  • 조회 수 444

[경기일보] 강진희 여주 술아원 대표, 천년 전통주 부활을 꿈꾸다 file

승인 2023-11-28 16:11 유진동 기자 jdyu@kyeonggi.com 여주 술아원 강진희 대표(우측에서 3번째)와 직원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경기콘텐츠진흥원 제공 여주 남한강 맑은 물과 진상미 여주쌀로 우리 술(전통주)을 빚고 있는 ‘술아원’...

  • 누룩
  • 2023-12-04
  • 조회 수 318

[매일신문][박운석의 전통주 인문학] <5> 작은 양조장 붐 file

택가·시장·지하철역 근처 직접 술 빚는 2030 늘었다 초기 부담 적어 창업 아이템 인기…젊은 사장님들 3평 소규모 마케팅 주 소비층도 MZ…정보·취향 공유 주룩주룩 공동대표들. 왼쪽부터 김항욱, 한빛찬, 박영건 공동대표 전통주를 만드는 소규모 ...

  • 누룩
  • 2023-11-24
  • 조회 수 356

[아시아 경제] 국내 최대 전통주 행사 ‘대한민국 우리술 대축제’ 24일부터 개최

정진기자 입력2023.11.20 10:00 국내 최대 전통주 행사 ‘대한민국 우리술 대축제’ 24일부터 개최 오는 24일부터 26일까지 농림축산식품부와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가 주최하는 국내 최대 전통주 행사인 ‘대한민국 우리술 대축제'가 개최한다고 밝혔다. 이번...

  • 누룩
  • 2023-11-20
  • 조회 수 449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