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주 : 술을 빚어 걸러 바로 마시는 술
청주 : 겨울에 빚어 여름이 되어 익는 술, 맑은 술
법주 : 궐 내에서 사용하는 술
감주 : 술 대신 마시는 음료
현주 : 제사 등에 술 대신 올리는 맑은 물
약주 : 어떤 술이건 약으로 마시는 술(대부분 청주의 일종)
청주(淸酒)란 청주라는 술이 있는 것이 아니라 “맑은 술”을 통칭하는 고유명사이다. 조선시대 수 많은 문헌 속에 “청주”라는 술은 없으며 단지 “맑은 술”의 뜻과 신분을 상징하는 술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청주와 함께 조선시대에는 “탁주(濁酒)”, “감주(甘酒)”, “약주(藥酒)”, “현주(玄酒)”, “법주(法酒)”, “소주(燒酒)” 등의 이름이 등장하고 있는데 이것은 술의 이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술이 갖고 있는 성격의 대표성을 갖는 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청주는 주로 상류층에서 마시던 술로 <세종 2년 1월 23일>에 임금이 원숙에게 명하여 말하기를 “술을 금지할 적마다 청주(淸酒)를 마신 자로는 죄에 걸린 적이 없고, 탁주를 마시거나, 혹은 사고 판 자는 도리어 죄에 걸리니, 사정이 딱하다. 지금부터 술을 금하는 기간이라도 무릇 부모 형제에 대하여 환영이나 전송을 하든지, 혹 늙고 병든 사람이 약을 마신다든지, 이를 위하여 매매하는 자는 금하지 말고, 그 놀기 위하여 술을 마시는 자와 다른 사람을 맞이하거나, 전송하느라고 마시거나, 매매하는 자는 일체로 금지함이 어떠할지 의정부와 육조와 대간이 의논하여 아뢰라.” 하였는데, 여기서 청주를 마신 자는 고위관리를 의미하고 탁주를 마신자는 힘 없는 백성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세조 2년 12월 23일> 예조(禮曹)에서 아뢰는 글 중에 “청주(淸酒)는 지금 중산(中山)에서 겨울에 빚어 여름에 접어들어야 이루어진다.’”라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봐서 청주는 술을 빚어 장기간 두었다가 술이 맑아진 다음에 꺼내 사용하는 술임을 알 수 있다.
탁주(濁酒)는 주로 힘 없는 백성들이 마시던 술로 술이 완성되는데 오랜 기간이 걸리는 “청주”보다는 술을 빚어 걸러 바로 마실 수 술이었음을 알 수 있다. 탁주를 오래 두면 자연히 맑은 술(청주)를 얻을 수 있겠으나 조선시대에는 시시때때로 “금주령”이 시행되어 양반집이 아닌 이상 술을 오래 두고 마실 수 없었으므로 술을 거른 상태(탁주)로 마셨을 것이며, “청주”보다는 “탁주”의 양이 많으므로 식량이 부족한 백성들에게는 좋은 먹거리가 됐을 것이다.
감주(甘酒)는 술을 잘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즐겼던 것으로 감주는 “술”이라기 보다는 “달콤한 음료”에 가깝다고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감주"라는 술 이름과는 차이가 있다.
<태종 16년(1416년) 9월 19일>에《주서(周書)》에 ‘제사에만 이 술을 쓰라.’고 하였으니, 예전부터 제사에 술을 쓰지 않는 일이 없습니다. 본조(本朝)의 선왕•선후의 기신재에 모두 요전(澆奠)이 있는데, 홀로 태조 강헌 대왕(太祖康獻大王)•신의 왕후(神懿王后) 요전에만 술을 쓰고, 그 나머지 요전에는 모두 다탕(茶湯)을 쓰니, 대단히 예(禮)에 합당하지 못합니다. 빌건대, 태조 요전의 예(例)에 의하여 기신마다 모두 술과 감주(甘酒)를 쓰소서.” 라고 기록되어 있다.
조선시대에 나오는 술 중에 “현주(玄酒)”라는 말이 나오는데 여기서 말하는 현주는 “술”이 아니라 술을 대신하여 사용하는 물로 “명수(明水) , 깨끗한 물”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즉, 현주는 술이 아니며 술 대신에 제사에 술 대신 사용하는 물을 의미하는 것이다. “감주”또한 마찬가지로 술 대신에 “단콤한 술”이라는 의미를 가지는 “음료”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거의 매년 봄이되어 비가 오지 않거나 전년도에 농사가 좋지 못하면 “금주령”을 시행하였기 때문에 제사나 큰 행사에도 술을 사용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제사나 큰 행사에 술을 대신할 수 있는 것을 사용하였는데, 이러한 것을 대체하는 것으로 맑은 물이라는 이름의 “현주(玄酒)”와 달콤한 술 이라는 의미의 “감주(甘酒)”가 생기게 된 것으로 보여진다.
“약주(藥酒)”는 따로 약주라는 이름을 가진 술이 있거나 약재를 넣어 빚은 술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술이건 “약이 되기 위해 먹는 술”의 의미를 가지면 “약술”이라고 불려졌다.
<성종 17년(1486년) 2월 29일>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 반우형(潘佑亨)이 와서 아뢰기를, “화천군(花川君) 권감(權瑊) 등은 사리를 아는 대신으로서 모여 가지고 술을 마셨으니, 청컨대 국문하도록 하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이것은 모여서 술을 마신 것이 아니다. 내가 듣건대, 권감이 병이 났는데 이숭원과 김순명이 이웃 마을에 함께 살기에 그 병을 위문하러 갔더니, 마침 권감이 기운을 순조롭게 하는 약술[藥酒]을 마시고 있었으므로, 잠시 서로 마셨을 뿐이라고 한다. 그러니 추문(推問)하지 말도록 하라.” 하자, 반우형이 또 아뢰기를, “대신(大臣)은 추문하지 말게 하면서 소민(小民)을 죄준다면, 징계되는 바가 없을 듯합니다.” 하였으나, 들어주지 않았다.
이때 성종은 강력한 <금주령>을 시행하고 있었으나 병을 가진 자가 약으로서 먹는 술과 술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에게는 죄를 주지 말것을 지시하기도 하였다. 즉, 이때의 약주는 한간에 떠돌고 있는 “술”의 높임말이나 “약재를 넣은 술”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병을 가진 사람이 약으로서 먹는 술이나 금주령등을 피하기 위해 “약으로 먹음”을 알리는 수단으로 사용된 것으로 보여진다.
“법주(法酒”는 청주와 마찬가지로 법주라는 이름의 술이 있는 것이 아니라 <태조 4년 4월 25일> 헌사(憲司)에서 금주령을 내리자는 상소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고려조 말기에 기강이 무너지고 예제(禮制)가 허물어져서, 사대부들이 모두 옛날 진(晉)나라 사람의 풍류를 본받아, 더벅머리로 술을 마시는 것을 스스로 잘난 사람[宏達]이라 하고, 예법을 폐기(廢棄)하고 세상 만사를 잊어버리니, 서민들이 또한 이를 본받아, 드디어 풍속이 되어 지금까지 고쳐지지 않고 있습니다. 손님을 대접하는 집을 보면 지위의 고하를 막론하고 사치만 서로 숭상하여 여러 날 동안 준비하고, 술이 궐내에서 쓰는 법주(法酒)가 아니고 과자(菓子)가 진기(珍奇)한 것이 아니며 기명(器皿)이 상에 가득 차지 않으면 감히 〈손님을〉 청하지도 않으니, 이것이 어찌 재물만 허비할 뿐이겠습니까? 〈상하의〉 등급이 없는 것이 큰 손실입니다. 심한 자는 한번에 두어 말의 술을 마시고 여러날 동안 정신 없이 취하여 시간을 모르고 일을 폐하는 데에 이릅니다. 원하옵건대, 지금부터의 종묘의 제사와 임금과 신하의 연회와 사신(使臣)의 영송(迎送) 이외에는, 신하들은 관직의 고하를 막론하고 〈여러 사람이〉 모여서 함부로 술을 마시는 것을 금하여 사무를 폐하는 일이 없게 하고, 공상(工商)•천례(賤隷)들도 떼를 지어 술을 마시는 것을 금하여 본성을 잃고 재화를 부르는 원인을 제거하고, 만약 범하는 자가 있으면 죄를 다스려서 크게 징계하되, 기한을 정하지 말고 영구한 법령으로 삼으소서.” 라고 하여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고 기록되어 있다.
즉, 법주라는 것은 “절에서 빚은 술”이거나 “법대로 빚은 술”을 의미하는 것이아니라 위에 기록되어 있듯이 “궐 내에서 사용하는 질 좋은 술”을 “법주”라고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