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주, 세계화의 길을 묻다]②7백년 전통 영양 초화주

조회 수 2593 추천 수 2 2010.07.21 15:17:37




->41도짜리 도자기병 초화주./ 하회탈춤꾼 이상호(오른쪽) 씨와 전통주 제조자 임증호 씨가 초화주를 주고받으며 전통주 부활의 의지를 다지고 있다.

[전통주, 세계화의 길을 묻다]②7백년 전통 영양 초화주
단맛 쓴맛 떫은맛 매운맛 묘한 배합…고려 때부터 명주로 명성

차창 옆으로 펼쳐진 영양 청기면 기암 계곡이 반변천을 따라 시원스럽게 이어지지만 영양 초화주(椒花酎)를 찾아 가는 길은 지글지글 끓는다. 연일 이어지는 폭염 때문이다. 애주가 이상호(66·하회탈춤 인간문화재) 씨는 그저 흥겨운가 보다. "저기 좀 보래. 절벽에 난 소나무가 백만불짜리야. 청기 계곡은 언제 봐도 내눈엔 금강산이구나!" 남이야 듣든 말든 혼자서 탄성을 내지른다. 명주를 찾아 가는 길이라서 그런지 연방 싱글벙글이다.
고려 중기 소설 '국순전'(麴醇傳)의 저자 서하 임춘(林椿)은 초화주를 두고 '청진만작 초화주(淸辰滿酌 椒花酎). 백발거연 공부춘(白髮居然 空負春)'이라며 '맑은 날 초화주 한잔이면 백발 그대로도 봄을 지나칠 수 있다'고 노래했다. 옛 문인들이 그렇게도 즐기던 초화주가 있어서 영양이 문향인가. 문향이기에 초화주를 빚는가. 수백년을 이어 온 '향기로운 술' 초화주를 찾아 우리 전통주가 가야 할 길을 더듬어 본다.  

◆700년을 이어 온 영양 초화주

"꿀, 약초로 향과 맛을 낸 초화주는 설날에 세배를 드리고 웃어른께 잔을 올리던 우리 술이지요." 대를 이어 수백년간 영양 초화주 제조 비법을 전승해 오고 있는 영양장생주 대표 임증호(58·영양군 청기면 청기리) 씨. 서로 수 인사도 하기 전에 이야기 보따리부터 푼다. "반변천 발원지인 청기면 물은 술 빚는데 최고지요."

예천임씨 시조 임춘의 31대 후손인 임 씨의 초화주 자랑은 끝이 없다. "조선시대에 들어서면서 여러 문중에서 빚었으나 일제 때 주세정책으로 거의 맥이 끊기고 유독 시와 술을 좋아하는 선조들 덕분에 우리 집안만이 유일하게 초화주의 맥을 이어 오고 있습니다." 원래 초화주의 고향은 개성인데 자신의 집안이 영양에 터를 잡았다는 임 씨는 "고려 문인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에도 이화주와 함께 초화주가 등장한다"며 적어도 이때부터 우리 명주 초화주의 긴 역사가 시작됐단다.

"아니 술이라도 권하고 자랑을 해야지…." 한참 동안 임 씨 이야기를 듣기만 하던 주당 이 씨가 목이 말라 더는 못 참겠다는 듯 불쑥 내뱉는다. 그제서야 임 씨가 술상을 내 온다. 41도짜리 도자기병과 30도짜리 유리병 두가지다. 초화주에 이끌려 수십리 길을 달려 온 이 씨기에 그냥 당기는 듯 술상으로 다가 앉는다. 술을 따르는 임 씨에게 술을 더 부어라는 듯 "더더더더…."라고 한다. 한잔을 단숨에 들이킨 이씨. 금세 만면에 웃음꽃을 피워 올린다. 불만스런 표정은 간데 없고 그냥 좋아서 못견디겠다는 표정이다. "초화주는 몇번으로 나눠 천천히 음미하면서 마셔야 제 맛을 느낄 수 있지요." 임씨는 술 마시는 법을 가르쳐 주곤 다시 잔을 권했다.

까다롭고 오랜 시간이 걸리는 초화주는 이렇게 빚어진다. 누룩 효모인 백국균을 피운 밀가루로 입국을 만들어 밑술을 담그고 쌀 80%, 누룩 20%로 본 담금 들어갈 때 고두밥과 천궁, 당귀, 황기, 오가피, 갈근 등 모두 12가지의 일월산 약초를 밑술에 넣고 보름 동안 발효를 시킨다. 15℃ 정도로 맞춰 저온 발효시키기 때문에 술이 시어지지 않는단다. 약재가 우러나고 향이 가미돼 잘 발효된 밑술은 토종꿀을 바른 항아리를 받쳐 소줏고리로 조심조심 술을 내린다. 감압증류 전통 비법으로 증류주 특유의 누룩내와 화근내를 말끔하게 지워내는 과정이 놀랍기까지 하다. 약재 향과 꽃향이 은은하게 살아나 깔끔하다. 특유의 싸아한 입안 자극과 달콤한 뒷맛은 초화주만의 특징. 입안이 향기로워지고 상쾌한 목넘김에 양주 마니아들도 금세 홀딱 반해 버린다. 특히 마시고 난 다음날 뒤끝이 깨끗하다는 걸 알고 선 '우리 전통주에도 이런 게 있었나'하며 다들 놀라워 한다. "어이. 사진만 찍지 말고 거기도 한잔해 봐" 그제사 목을 얼추 축인 이 씨가 일행에게 잔을 권한다. 딱 한잔에도 톡 쏘듯 입안에 술이 번지고 향기가 콧속을 가득 채운다. 흥겨움에 가슴이 일렁인다.  

"초화주는 우리네 인생처럼 단맛과 매운맛, 쓴맛, 떫은맛 등 일월산 약초의 다양한 맛이 어우러지면서 독특하고도 특유의 맛을 내지요." 초화주에 대한 임 씨의 사랑은 자식과도 같다. 이웃한 두들마을 소설가 이문열 씨도 술을 대 놓고 사갈 정도로 접빈객 행사엔 빠짐없이 초화주다. 고려,조선 수백년간 우리 조상들이 즐기던 초화주가 영양만큼은 옛 그대로 문인들에 의해 사랑받고 또 다음 세대로 이어지고 있는 셈이다.

◆초화주는 기도하는 마음으로 빚는다.

한참 초화주 자랑만 하던 임 씨가 담배를 피워 문다. 초화주를 시작하고 나서 신용불량자가 되고 공장마저 경매 처분될 위기까지 처한 상황이 그에게 담배를 물게 했다. "한때는 공장 댓마루에 목 매고 싶은 심정이었지요. 담배가 유일한 낙이 돼 버렸어요." 1979년에 부친으로부터 양조장을 물려 받은 임 씨는 효성이 남달라 중학교 때부터 바쁜 술도가 일손돕기를 자청했다. "아버지의 가업인 양조장 문닫기가 싫어서 초화주를 시작했습니다. 집사람이 초화주 복원에 더욱 적극적이었어요."

이농으로 양조장도 하나 둘 문닫기 시작했다. 선대로부터 내려 오던 소줏고리를 다시 차려놓고 초화주 상품화에 나선 임 씨는 의성 과수원을 팔고 안동 나대지를 파는 등 외환위기 당시 7억8천만원을 들여 공장을 차렸다.  

"전통음식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반주로 만들어 달라고해서 초화주 시제품을 냈는데 그 땐 다들 대박난다고 했지요. 한 10여 년 초화주에 빠져 살다보니 선대의 골기와집은 저절로 무너져 버리더군요."

가산을 다 털어 초화주를 복원하다 국내 시장 벽에 부닥치면서 빈털터리가 됐다. 서울대에 들어 간 큰 딸은 남의 돈을 얻어 와 '심청이 키우듯' 대학을 시켰다고. 지인인 안동의 모 병원장 도움을 얻어 겨우 대학을 마치게 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둘째 딸은 등록금 대줄 형편이 아닌 걸 알아 차리고 제 스스로 벌어 대학을 나왔지요." 끝이 보이지 않는 기나긴 운영난. 이제 겨우 신용불량자에서 벗어났지만 살던 아파트도 처분하고 공장 컨테이너에 기거한다. 설비도 바꿔야 하는 데 운전자금도 바닥이다. 진퇴양난인 임 씨의 줄담배 사연과 한숨섞인 넋두리를 잠자코 듣던 이 씨가 넌지시 술잔을 권한다. 두 사람이 한참을 주거니받거니 한다. 예능인과 기능인으로 한세상 살아 오면서 서로 고생한 이야기를 나누던 두사람은 초화주가 독해서인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둘 다 눈시울이 붉어졌다.

"초화주를 빚어서 한병 한병 술을 담글 때 마다 아들에게 따슨밥 한그릇 먹여 보내려던 우리 어머니의 절실한 마음이 됩니다."

자신이 만든 초화주가 애주가들에게 감동을 주지 못하면 이제는 죽는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임 씨는 일한다. 가장 약효가 뛰어날 때 약초를 캐고 가장 적당한 계절이 술을 내린다. 지난 10여 년간 가슴에 응어리진 혹독한 시련이 초화주를 빚는 임 씨에게는 이제 간절히 기도하는 마음으로 승화됐다. 마치 도공이 도자기 굽는 마음으로 오늘도 그는 그렇게 술을 빚는다. 고운 정으로 시작한 초화주가 이제 미운 정까지 들어 떼려야 뗄 수 없는 임 씨 인생의 한자락이 돼 버렸다.

◆세계정상들도 놀란 영양 초화주

초화주에 고추가 들어 간다는 건 잘못된 얘기. 고추가 아니라 후추를 쓴다. 고려 때 한방약재로 쓰던 후추의 매운맛과 꿀의 단맛이 독한 증류주 속에서 조화롭게 어우러져 오묘한 초화주의 독특한 맛을 창출한다. 꿀이 들어 간 술은 이전에도 상품화를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반면 초화주는 알코올은 꿀이 풀어 주고 열은 한약재가 내려 준다. 그러니 희한하게도 숙취가 없는 것이다.

"2000년 서울 아셈(ASEM) 정상회의 때 공식 건배주로 지정받지 못했으면 난 벌써 망해 공사판에나 전전할 수밖에 없었을 거예요." 당시 초화주는 그해 두차례의 전통식품 품평회에서 대상을 받았다. 까다로운 식약청의 성분분석 과정도 다 통과했다. 잔류농약이나 유해 첨가물이 있는지를 꼼꼼하게 체크하는 과정이다. 2008년에는 우수특산품 대상을 받기도 했다.

"일본은 주세를 지방세로 전환시켜 전통주 활성화의 계기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당시 일본 현마다 직접 주세를 거둬 재투자를 해주고 술도가는 더욱 열심히 전통주 생산에 매진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됐지요." 얼마전 정해걸 국회의원의 '우리술 진흥법'으로 전통주에 대한 주세가 낮아지기는 했지만 주세가 지방세로 전환돼야 지자체 세수증대에 직접 기여할 수 있어서 담배소비세처럼 대우를 받을 수 있게 된다는 것.

10여 년 전 술 한방울 못마시던 임 씨는 지금 초화주 2병을 거뜬히 비운다. 아셈 공식 건배주로 선정돼 세계정상들을 놀라게 한 초화주는 이번엔 G20 정상회의 때 공식 만찬주로도 꼭 지정 받도록 노력해 볼 것이라고 다짐한다. 그걸 바탕으로 세계로 나가 보겠단다. 세계 속의 명주를 빚어 보는 게 임 씨의 마지막 꿈이다. 곁에 있던 이 씨가 임 씨의 어깨를 두드린다. 힘을 내라고 꼭 될 거라고 하면서….

매일신문 권동순기자 pinoky@msnet.co.kr
김경돈기자 kdon@msnet.co.kr
사진 프리랜서 강병두 pimnb12@hanmail.net
2010/07/17 [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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