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가신사(일본술의 뿌리를 찾아서)

조회 수 4622 추천 수 0 2012.10.16 22:2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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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821() 사가신사 방문

 

간사이 국제공항에서 오사카로 이동해 숙소에 짐을 풀었지만 막상 사가신사를 가려니 막막했다. 여러 신문기사나 블러그, 카페 등에도 사가신사를 찾아가는 방법에 대해서는 알려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본에 있는 지인들에게 수소문해도 사가신사에 대해서는 알고 있지 않았다. 지도를 검색하고 검색해도 술 하는 사람은 다 알고 있다는 사가신사는 찾기 힘들었다. 단지, 교토에 있다는 것밖에는 아는 것이 없었다. 술 하는 사람들도 백제 인번’, ‘수수보리에 대해 말들을 많이 하지만 정작 사가신사를 갔다왔다는 사람은 없는 것 같았다.

 

일본에 와서 여러 지도를 찾고 찾아서 21일 새벽에야 사가신사위치를 찾을 수 있었다. 카메라와 지도를 챙겨 교토역에서 나라방면으로 전차를 타고 가다보면 긴테쓰 미야즈(Kintetsumiyazu)’라는 역이 나온다. 역에 출구가 하나밖에 없으니 아주 작은 역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역에 내리자마자 넓게 펼쳐진 평야에 벼농사를 하고 있었다. 우리나라의 전라도 같은 느낌이 났다. 산은 낮고 벼농사를 많이 하는 것으로 봐서 물 공급이 아주 좋은 지역처럼 보여졌다.

 

간이역을 나와 사가신사로 향하게 되면 아주 작은 마을이 나오는데 사람도 많지 않고 아주 적막하다. 이 길로 가다보면 아주 작은 신호등이 나오는데 세발자국만 넘으면 되는 길인데 신호등이 아기자기하게 있었다. 이 길에서 오른쪽으로 걸어가야 사가신사입구가 나오게 된다. 그런데 이 길에 인도가 없어 사람이 다니기에는 위험한 것 같았다.

 

사가신사입구

 

뭔가 대단해 보이는데 조금 떨어져서 보면 사람들이 찾기 힘든 곳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입구와 길이 붙어있어 정말 위험한 곳에 사가신사를 만나게 됐다. 그리고 TV에서 아주 크게 나왔던 사가신사안내문은 자칫 찾지 못하고 돌아 올 뻔 했다. 생각보다 너무 작았기 때문이다. A4용지보다 조금 더 큰 흰색 나무판에 잘 보이지도 않게 세워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일본의 다른 신사들과는 많이 비교가 되었다. 아마도 사가신사에 모신 신은 일본 사람들도 그리 중요하게 생각하는 신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사가신사두 번째 입구로 향했다.

 

가는 길에 쓰러져가는 주차금지표지가 왠지 슬프게 느껴졌다. ‘사가신사주자창 같은 곳은 모두 동네 차들이 모여있는 것 같았다. 입구에 있는 빨간 신사를 지나 계단을 올라가면 작은 공간이 하나 나오고 여기서 계단을 다시 올라가서 목적지인 사가신사를 만날 수 있었다. 그런데 관리하는 사람도 없고 거미줄도 있고 신사안쪽은 잠겨있어 들어가지도 못하게 되어 있었다. 신사에 낙엽이나 의자가 덩그러니 있어 어떤 큰 행사때만 문을 열어 놓는 것처럼 보여졌다. 그리고 신사 저 뒤쪽으로 영정이 보였다. 영정까지는 문이 잠겨있어 안쪽으로 월담을 하려다가 국제적 망신을 당할 것 같아 억지로 참았다. 대신 최대한 구석구석 촬영을 하고 사가신사탐방을 마칠 수밖에 없었다.

 

막상 사가신사를 가서 직접 눈으로 보니 사실 실망감이 매우 컸다. 들어오는 입구도 그랬고 관리하는 사람이 없어 쌓인 낙엽이나 거미줄 등이 신사를 매우 음산하게 만들고 있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쓰러져가는 표지판과 자칫 찾지도 못 할 뻔한 작은 사가신사안내판은 왠지 쓸쓸해보이기도 했다. 한국에서는 수수보리수수보리, 백제인번 등을 말하지만 정작 사가신사는 버려져 있는 것 같았다.

 

오래전부터 궁금했다. ‘사가신사가 어디에 있는지 그리고 어떤 모습일지 사가신사를 찾는다는 것은 나에게 매우 고대했던 일들 중에 하나였다. 책에서 읽고 그 읽은 내용을 학생들이나 사람들에게 전해줄 때 왠지 미안했고 왠지 미흡했었다. 가보지 않고, 해보지 않고 말한다는 것은 언제나 찜찜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찾았고 그래서 이 글을 쓰고 있는 것이 스스로는 매우 대견했지만 받은 느낌은 매우 처량했다. 다시 가고 싶은 생각이 없을 만큼 받은 느낌도 그리 좋지 않았다. 아마도 사진을 찍으면서 수많은 모기에 물렸기 때문인 것 같다. 얼마나 많이 물렸으면 무릎에 통증까지 왔으니 사가신사를 방문한 흔적을 제대로 남긴 샘이다.

 

우리나라가 누룩을 언제부터 만들었는지는 정확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 그러나 곡물을 재배하고 농사 기술이 발달하게 되면서 술의 원료도 과실이나 꿀 등에서 자연스럽게 곡물로 빚는 술로 넘어왔을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지나 쌀, , 보리가 재배되면서 곡물을 당화시키는 엿기름에서 점차 밀을 이용한 누룩으로 발전하게 됐고 이것이 아마도 최초의 누룩 기술이었을 것으로 보여 진다. 이렇게 누룩으로 술 빚는 기술이 일본에 전해진 것은 어떻게 보면 너무 당연한 것이다.

 

누룩은 크게 떡누룩과 흩임누룩으로 나눌 수 있고 중국은 대부분 떡누룩, 우리나라는 떡누룩과 흩임누룩 둘 다 이용하고, 일본은 흩임누룩을 이용하는데 이는 그 나라의 환경 특히, 습도의 영향이 가장 컷을 것으로 보여 진다. , 우리나라가 떡누룩을 전해졌고 일본 사람들이 환경에 맞춰 흩임누룩으로 발전한 것이 아니라 떡누룩과 흩임누룩 기술 모두 전해졌고 그것이 발전하여 지금 일본의 코지로 발전하게 되었을 것이다. 백제의 인번이라는 사람이 일본에 누룩으로 술 빚는 기술을 전해졌다는 것은 기술을 전해주고 다시 한국으로 왔다기 보다는 교토에 그 당시 고구려, 백제, 신라 사람들이 많이 거주했고 당연히 술 제조기술이 일본에 전해지게 되었을 것이다.

 

이번 교토의 사가신사 방문을 통해 크게 두 가지 느낀 것이 있다. 하나는 교토에서 우리술의 뿌리를 찾는 다는 것이 큰 의미가 없다는 것과 두 번째는 역설적으로 우리의 뿌리에 대한 연구가 없었다는 것이다. 첫 번째는 교토 자체가 한국의 손이 너무 많이 닿아있는 부분이라 꼭 우리나라의 뿌리를 찾지 않아도 교토 자체가 우리의 뿌리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가 그렇게 말로 떠들고 다녔던 역사 유적지에 대한 관리가 전혀 이뤄지지 않고 있는 점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만든 계기가 되었다. 알고는 있으나 관심은 없는 곳, 뿌리는 있으나 싹이 자라지 않는 곳이 사가신사인 것 같다. 우리술이 세계화 되지 못하고 있는 이유와 같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2012821일 사가신사 앞뜰에서 류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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