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 우방과 제국, 한미관계의 두 신화

조회 수 2074 추천 수 163 2006.10.16 23:21:54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은 과거의 행동을 되풀이 할 운명에 처한다.”
- 조지 산타아나

‘과거로부터 배우지 못하는 사람은 과거의 실수를 반복한다’는 뜻을 담은 산타아나의 충고는 박태균의 『우방과 제국, 한미관계의 두 신화 - 8.15에서 5.18까지』이 주장하는 교훈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미국이 재채기를 하면 일본은 감기에 걸리고 우리는 몸살을 앓는다는 시쳇말이 보여주듯 한미관계는 우리의 삶과 떼려야 뗄 수 없는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우리가 미국과 처음 관계를 맺은 것은 1866년 일어난 제너럴셔먼호 사건과 뒤이어 벌어진 1871년의 신미양요였다. 강화도 광성진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조선은 350명의 전사자를 냈고, 미국은 3명의 전사자를 냈다. 이 전투에서 미군은 조선군을 거의 전멸시키고, 조선군 지휘관의 상징인 수(帥)자기를 전리품으로 포획했다. 이 깃발은 애나폴리스(Anapolis)의 해군사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가 양요(洋擾)로 기억하는 것을 미국인들은 "한국탐험(Korea Expedition)" 혹은 "작은 전쟁(little war)"으로 기억한다.

굴절 많은 우리의 근현대사에서 미국과 맺은 첫 관계가 민중의 저항과 무력에 의한 것이었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지만, 다른 한 편으로 미국에 대한 우리의 짝사랑은 최근의 근대성 연구들 - 일제 하 지배엘리트들은 이미 다른 어떤 나라보다 미국 문화를 우선하여 수용했다 - 이 보여주듯 그 역사가 오래 되었다. 구한말 우리의 짝사랑이 가쓰라-태프트 밀약으로 쓴 맛을 본 것처럼 한미관계는 역사 이래 불평등하고 호혜적이지 못했다. 그럼에도 미국은 여전히 가장 많은 해외 교포들과 유학생들이 거주하는 곳이며, 우리들 자신도 인정하듯 냉전의 시작과 함께 미국식 전후 체제가 만들어낸 가장 성공적인 국가 모델이 바로 대한민국이다.

숭미(崇美)와 혐미(嫌美)를 반복하는 대미인식은 그 자체로 우리가 미국과 맺어 온 관계의 복잡함과 밀접함을 반증한다. 『우방과 제국, 한미관계의 두 신화 - 8.15에서 5.18까지』은 제목에서 알 수 있듯 그간 한미관계를 가리고 있는 숭미와 혐미의 신화를 거둬내고, 이를 우방과 제국이라는 틀로 재인식하려는 시도이다. 사실, 박태균 이전에도 한미관계에 대한 인식의 균형을 잡고자 하는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90년대 초반까지만 하더라도 한미관계에 대한 인식은 80년 5.18 이후 계속되어 온 격앙된 반미 정서로부터 일정하게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러나 최근의 정서는 냉전 체제의 종식 이후 미국을 중심으로 일극적 세계체제가 형성되면서 극단적인 대세추구론, 현실인정론으로 기우는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분위기에서 나온 박태균의 『우방과 제국』은 양 극단의 인식 사이에서 올바른 균형을 잡으려고 시도한다.

그는 우선 한국현대사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미국과의 관계를 이해해야 한다고 전제한다. "미국은 한국현대사에서 단지 외부적인 조건이 아니라 한국사회를 움직인 하나의 ‘주체’였으며, 한국을 도와주고 지켜주는 ‘우방’이자 세계질서를 주도하면서 한국에 개입하는 ‘제국’이었다."(본문 4쪽) 우리가 오늘날 한미관계를 제대로 이해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는 현재 우리 앞에서 시급한 현안으로 떠오르고 있는 전시 작전통제권 환수, 한미 FTA, 이라크 파병 등 다양한 사안에 대해 과거의 한미관계를 공부하지 않고는 실수를 반복할 따름이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싶어 한다. 그것이 이 책이 쓰인 목적이다.

한국과 미국의 관계는 매우 특수하기 때문에 일반적인 외교 상식으로는 이해될 수 없는 일들이 숱하게 벌어져 왔다. 때로 한미관계는 국가 대 국가의 관계라기보다는 마치 로마제국의 군대가 주둔하고 있는 변방 속주 중 하나이거나 자치령 중 하나로 보는 것이 더 적절해 보인다. 그와 같은 특수한 관계를 만들어낸 원인이 무엇일까? 그 중 하나는 주한미군이 작전지휘권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전쟁이 벌어진 직후 이승만 대통령이 넘긴 작전지휘권은 이후 현재까지 한국현대사의 다양한 국면에서 미국이 결정적인 순간의 조타수 구실을 하게 만들었다. 1961년 5.16 쿠데타 직후, 1979년 12.12 쿠데타 그리고 1980년 5월 광주의 진압을 위한 부대 이동에 이르기 까지 미국은 그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군대의 이동을 저지하거나 승인하는 것만으로도 우리 역사의 중요한 주체로 참가해왔다.

박태균은 한국과 미국이 과연 서로 동맹으로 불릴 수 있는 관계인지 반문한다. "동맹관계는 동일한 적에 대한 공통된 이해관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맺어지는 것이지만, 동맹국간의 이해관계의 크기에서는 큰 차이가 나타날 수 있다."(본문23쪽) "특히 역사 속에서 한국과 미국의 관계가 서로 주고받는 관계가 아니라 불평등한 관계였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동맹’이라는 용어가 적합한 것인가"(본문 24쪽)라며 의문을 제기한다. 그에 따르면 미국은 이승만 제거 계획을 두 차례나 세웠으나 결국 그를 대체할 만한 지도자를 찾아낼 수 없어 포기했고, 5.16직후부터 민정이양에 이르는 시기에 공작정치를 주도한 김종필의 제거를 박정희에게 권유하여 관철시키기도 한다. 민주공화국의 국가 최고 권력이 국민에 의하지 않고, 특정한 한 국가에 의해 좌우되는 상황을 단순히 작전지휘권의 문제만으로 돌리기기엔 부족하다.

한국의 정치는 다음과 같은 전형적인 태도들에 기초해 있다. 1) 파벌주의 : 내 파가 아니면 다른 파 2) 실용주의 : 나와 내 가족을 위한 것인가 3) 허무주의 : 정부와 관련된 모든 것은 나쁘다 4) 개인주의 : 너는 나에게 이것을 해줄 수 없다 5) 정책보다는 지도자들에 대한 사적인 충성심 6) ‘거물’이 되고자 하는 희망 7) 한국의 통일을 향한 열망 8) 민족주의 또는 더 정확하게 인정(忍情)의식 9) 전통적인 유교사상 잔재의 영향 10) 서양 정치이론의 영향. 여기에 1950년부터 내려온 공산주의에 대한 혐오와 불신이라는 건강한 사고만이 추가되어 있을 뿐이다.
이러한 태도들로 인해서 1) 새로운 그룹에 표를 던지지 않으며 빨리 불신하게 되는 현상 2) 단기적인 안전 또는 만족을 위해 이상을 내던져버리는 현상 3) 즉각적이며, 눈에 보이는 보상을 제공하지 않는 그룹을 지지하지 않는 현상 등이 나타나고 있다.  - 1956년 2월 13일 미국 보고서(미국국립문서보관소)에서 (본문 137쪽)재인용

어찌되었든 관계란 그것이 일방적이든 종속적이든 상대의 존재를 전제로 한다. 상대가 없는 관계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위의 인용문은 미국이 1956년 당시 한국의 정치적 특성에 대한 평가이지만, 불행히도 이와 같은 분석은 오늘날 우리 사회에도 여전히 부합한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미국의 한국, 한국 국민에 대한 인식을 바꿔줄 필요가 있다. 박태균은 유신시대 말기, 미국이 한국의 정서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고 말한다. 당시 주한미국대사관은 한국인들이 아직도 "역사 / 문화적 요인들 때문에 강력한 정부를 받아들일 필요를 느끼고 있으며" 당분간 "유신 체제의 제약들 속에서 살아갈 능력과 용의를 갖고 있다는 증거"들이 나타나고 있다고 보았고, 한국 사회의 민주화에 대한 열망을 간과했다. 과연 이것이 미국의 간과인지 아니면 그들 자신이 한반도에서의 이해관계를 관철시키기 위한 의도적인 무시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결과적으로 이와 같은 미국의 판단이 결국 5.18 광주항쟁의 무력진압을 승인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때의 경험(학습효과)이 1987년 6월 항쟁 시기 전두환이 군대를 동원하고자 했을 때, 특사를 보내 이를 저지하게 만든 원인이 되었다.

미국은 이승만과 장면, 박정희, 전두환 등에 이르는 시대를 거치며 한국 정부를 상대하는 방법을 경험적으로 학습하고 그 결과를 축적해왔다. 박태균은 과거 한미관계가 대등할 수 없었던 것은 비민주적인 방법으로 집권한 정권들의 태생적인 한계에도 있지만 ‘국가안보’를 빌미로 ‘정권안보’에 치중한 정권을 경제성장 혹은 안정이라는 미명 아래 승인해온 우리들 자신에게도 있음을 우회적으로 지적한다. 만약 한국에 민주적인 정부가 수립되어 있었다면 한미관계는 좀더 정상적인 관계로 나아갔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의 우리는 무엇인가? 87년 혁명 이후 어느새 20여 년간 지속된 절차적 민주화에 의해 수립된 민주주의 정부 아래에서도 여전히 지속되는 한미관계의 불평등함은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일까? 박태균은 이것이 지속되는 독재의 유산이며, 국제관계를 바라보는 사회진화론적인 약육강식 담론을 우리들이 내면화한 결과라고 비판한다. 그리고 베트남전쟁을 통해 누렸던 경제적 ‘특수’를, 미국과의 동맹으로 덩달아 우리도 ‘제국’이 될 수 있다는 음험한 욕망이 왜곡된 한미관계를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이 한 권의 책이 한미관계 60년의 역사를 모두 설명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한 권의 책을 통해 해방 이후 60년간 우리 사회의 역사를 만들어온 또 하나의 주체로 자리하고 있는 미국과 미국이라는 실체, 신화에 투사하고 있는 우리들 자신의 어두운 자화상을 발견할 수 있다. 광화문 네거리에 성조기를 휘날리고, 영어로 설교하며 이 땅의 대중이 아닌 저 먼 곳 어딘가에 앉아있는 이들에게 들어달라고 읍소하는 속주(屬州)의 지배 엘리트들과 협상테이블 앞에만 가면 저절로 무릎걸음을 걷는 관료들, 일본을 능가하는 동맹자가 되기 못해 안타까운 이들, 의용병으로라도 이라크에 보내달라는 젊은이들, 아니 반미를 부르짖지만 속으로는 대세라 어쩔 수 없지 않느냐고 자문자답하는 우리들 자신 말이다.

* 이 책은 『조봉암 연구』, 『한국전쟁』 등을 통해 익숙해진 박태균(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이 미로처럼 복잡하고 어두운 우리 근현대사를 대중의 시선으로 풀어내는 작업의 연장선상에 있다. 역사란 너무나 중요하기 때문에 역사학자들에게만 맡겨놓을 수 없다는 말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간 우리 학계는 ‘대중적’이라는 말을 지나치게 경시해온 것도 사실이다. 물론 일각에서는 역사대중화를 빙자하여 베스트셀러를 염두에 둔 ‘대중적인 역사서’ 만들기에 나선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박태균의 작업들은 이전의 저서들에서도 살필 수 있듯 방대한 실증 자료들을 면밀히 검토한 결과물이며, 쉽게 찾을 수 없는 자료들을 전문적인 식견으로 살핀 뒤 이를 바탕으로 대중적인 시선에 맞추어 재구성한 것들이다. 물론 어떤 연구자든 모두 이런 과정들을 거치게 마련이다. 하지만, 박태균의 특별한 장점이라면 명확한 주제의식과 논거, 꾸미지 않은 간결하고 정확한 문장, 그리고 무엇보다 장생의 줄타기만큼이나 위태롭지만 줄에서 떨어지지 않는 균형 감각이 아닐까 싶다.


출처 : http://windshoes.new21.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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